예전 학창시절 엄청 푹 빠져서 "감동의 물결"을 느끼며 봤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만화들. 그때 내 감성을 흔들고 더 풍부하게 해주었던 고마운 만화들. 냉미남의 지존이었던 에일레스, 엔딩이 너무 인상적이었던 까만 우주 속 시이라젠느의 <별빛속에>까지... "꺄~~"와 "ㅠ.ㅠ"로밖에 표현할 수가 없는 참 대단한 만화들.

순정만화의 상상력을 넓힌 다섯 편의 순정 판타지를 소개하는 전시회가 열린다.
한국만화박물관은 오는 8일부터 내년 2월 26일까지 ‘Fall in Fantasy’ 전시회를 개최한다.
순정만화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 김혜린의 ‘불의 검’, 김진의 ‘바람의 나라’, 강경옥의 ‘별빛 속에’, 황미나의 ‘레드문’이 그 주인공.
전시에는 다섯 작가의 프로필 및 전시작품에 관한 작가의 의견을 담은 동영상 인터뷰와 다섯 편의 작품의 줄거리 및 캐릭터를 분석해보고 원화와 표지, 칼라 일러스트 등이 함께 전시된다.
한국의 순정만화는 50여년의 역사 동안 내용과 스타일 면에서 변화를 거듭하며 발전해왔다. 지금까지 순정만화는 국내 만화계에서 하나의 장르로써 분류되어 왔지만, 현재는 하나의 이름으로는 아우를 수 없을 만큼 변화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즉 현재의 순정만화는 초창기 순정만화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로맨스 장르 뿐 아니라, 역사, 학원, 판타지, SF, 호러, 코믹 등 여러 개의 하위 장르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순정만화가 내용적으로나 표현적인 면에서 다각도로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순정만화의 하위 장르 중에서도 판타지(SF 포함) 분야는 국내의 순정만화를 내용과 스타일 면에서 한 차원 높게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판타지라는 장르를 통해 작가들은 전혀 새로운 세계와 인물을 창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판타지 장르를 개척, 발전시켜온 작가의 작품들 중 완성도 높은 다섯 편의 대작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순정만화의 변화된 모습을 다각도로 보여주는 것이 목표다.
신일숙: <아르미안의 네 딸들>

“미래는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는 아포리즘으로 기억되는 신일숙의 초기 히트작.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고대 갈데아 지방에 위치한 가상의 나라인 ‘아르미안’의 네 딸(공주)들이 겪는 파란만장한 운명을 그린 역사 판타지 만화다.
아마존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아르미안은 대대로 불새의 피를 이어받은 여왕이 통치하는 신비한 나라이며, 당시 갈데아 지방을 지배하던 ‘페르시아’와는 대조적으로 여성적인 문화가 발달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 그림과 치밀한 스토리 구성, 그리고 방대한 스케일로 독자들을 압도한다. 특히 고대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실제 역사가 가상의 이야기들과 절묘하게 섞이고, 그리스‧로마 신화를 비롯하여 근동의 신화들이 적절히 변형되면서 재창조되는 것을 읽어내는 것은 작품을 읽는 재미 중 하나다.
강경옥 <별빛 속에>

한국 최초의 순정 SF판타지로 출판 당시 독자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특히 칠흑 같이 검은 하늘에 별을 그린 장면이나, 우주공간을 그린 장면들은 <별빛 속에>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창조해내는데 큰 몫을 했다.
주인공인 유신혜는 천문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별을 좋아하고 우주를 동경하는 평범한 고교생이다. 그런 그녀가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행성, 카피온의 제1왕녀 ‘시이라젠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녀의 삶은 혼란스러워 진다. 처음에 그녀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며 지구를 떠나지 않으려 하나, 그녀를 여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세력과 반대세력과의 싸움에 휘말려 가족과 친구가 죽게 되자 카피온행을 결심한다. 과학기술이나 메카닉보다는 초능력이 주된 힘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주인공을 비롯한 캐릭터들의 심리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카피온의 ‘성역’이라는 공간이 상징하듯, 특정한 종교를 넘어선 ‘신적인 것’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있기도 하다.
김혜린 <불의 검>

<북해의 별>, <비천무> 등으로 유명한 김혜린의 역사 판타지 만화로, 지난여름 뮤지컬로 제작되기도 했다. 고대 북만주에 위치한 부족국가 ‘아무르’는 철기로 무장한 ‘카르마키’의 침략을 받고, 각지로 흩어진다. 아무르인들은 자신들의 청동기로는 철기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카르마키에 잠입하여 철기 제조비법을 알아내기 위해 애쓰고, 주변의 이웃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 카르마키에 대적하려 한다. 한편 유목민족이었던 카르마키는 정착민이 되면서 정신적‧문화적으로 타락해가고, 이들의 타락이 카르마키의 멸망을 재촉하게 된다.
청동기에서 철기로의 교체, 유목민과 정착민의 대결이라는 역사적 모티프가 <불의 검>을 시작하게 했다면, 이 작품을 마무리하는 것은 여주인공 아라의 애틋한 사랑일 것이다.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온갖 시련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아라의 모습은 인간의 역사가 유물과 유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뜨거운 살과 피로 이루어져 있음을 상기시킨다.
김진 <바람의 나라>

고구려의 초기 역사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역사 판타지. 낙랑을 정복하고, 한나라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던 제3대왕 ‘무휼’(후에 대무신왕이 됨)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무휼은 자신의 아버지였던 유리왕이 왕자의 난을 두려워하여 형이었던 ‘해명’을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그를 혐오한다. 하지만 이후 자신이 왕좌에 오르자, 그 역시 친아들인 ‘호동’이 자신을 위협할까 두려워 그의 신수(神獸)를 해하는 등 똑같은 비극을 반복하게 된다.
<바람의 나라>는 왕과 왕자와의 미묘한 권력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주변 상황에 따라 각각의 캐릭터들이 변화해가는 모습을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한편 호동과 낙랑공주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자명고는 천기를 읽는 능력을 지닌 낙랑의 두 왕자, ‘충과 운’으로 그려져 실제 역사보다 더욱 생생한 느낌을 준다. 동명의 게임으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누렸고, 뮤지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황미나 <레드문>

로맨스, 무협, 역사, 코믹 만화 등 다양한 장르에 능한 작가 황미나의 SF 판타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으며,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시그너스라는 행성의 태양(구원자, 메시아 같은 존재)으로 키워진 ‘필라르’는 반란군을 피해 지구로 오게 되고, 윤태영이라는 소년의 육체를 빌어 살아가게 된다. 이윽고 반란군이 보낸 세력에 의해 봉인되어 있던 필라르로서의 의식이 깨어나게 되고, 완전한 각성을 위해 원래의 육체로 돌아갈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필라르의 육체를 파괴해버리고, 필라르-태영이라는 몸을 갖고 시그너스로 돌아간다. 시그너스에서 필라르-태영은 사람들이 기대하던 태양이 아닌, 그의 동생인 ‘아즐라’를 진정한 태양을 만들어내는 조력자로서 희생하게 된다. 그는 태양이 아니라 ‘레드문(태양 이전의 붉은 달, 혹은 가짜 태양)’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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