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전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미국인 선생님(그는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이 "미국 영화를 비디오로 볼 때 한글 자막을 보면 부부나 연인 사이에서 남자는 반말, 여자는 존댓말 쓰는 게 참 이상하더라. 영어에서는 둘다 똑같이 말하는데..."라고 말씀하셨다. 평소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자연스럽게 넘어갔던 그 부분을 그 외국인 선생님의 지적을 통해 뭔가 문제가 있음을 더욱 명확히 깨닫게 되었다.
남편은 아내에게 반말, 아내는 남편에게 존댓말 쓰던 TV 드라마도 요즘은 많이 바뀌어서 젊은 부부나 연인은 둘다 서로에게 똑같이 존대를 하거나 똑같이 반말을 쓴다.
비디오 한글 자막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공중파에서 성우들이 더빙한 외화도 비디오 자막과 별반 다를게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여성민우회가 9월부터 10월까지 공중파(KBS1, KBS2, MBC, SBS)에서 방송된 영어권 외화 27편을 분석한 결과, 여자와 남자 캐릭터는 서로에게 다른 언어를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우회는 우선, 가장 친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는 남녀 간의 부부 혹은 연인관계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에게 사용하는 언어에 불균형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평등한, 권력 관계가 없던 영어 대사는 한국어 더빙을 거치면서 불평등한 상하관계로 바뀌어버렸다.
영화 <투모로우>에서
남편 : I just saw that Sam got an F in calculus.
부인 : I'm aware, Jack. I get a copy of his report card too.
남편 : 샘 성적표가 왔는데 알아? 미적분이 F야.
부인 : 알아요. 성적표 봤어요.
남편 : I just saw that Sam got an F in calculus.
부인 : I'm aware, Jack. I get a copy of his report card too.
남편 : 샘 성적표가 왔는데 알아? 미적분이 F야.
부인 : 알아요. 성적표 봤어요.
영화 <트루크라임>에서
남편 : It's me, sweetheart.
부인 : Steve, thank God. Where are you?
남편 : I'm at the paper. They roped me in.
부인 : Oh no. Did they call you at the gym?
남편 : 나야.
부인 : 세상에...지금 어디에요?
남편 : 일이 좀 생겼어.
부인 : 헬스클럽으로 전화했어요?
남편 : It's me, sweetheart.
부인 : Steve, thank God. Where are you?
남편 : I'm at the paper. They roped me in.
부인 : Oh no. Did they call you at the gym?
남편 : 나야.
부인 : 세상에...지금 어디에요?
남편 : 일이 좀 생겼어.
부인 : 헬스클럽으로 전화했어요?
이뿐만 아니라 같은 사회적 지위라도 남녀에 따라 언어가 달라진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성들은 대부분 누구에게나 하대를 하지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성은 누구에게나 존대를 한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성이 누구에게나 하대를 하는 것은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지만, 여성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성을 표현하듯이 대부분의 경우 상대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며 부드럽고 사려 깊게 행동한다.
엄연히 흑백간 빈부간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하던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파프롬 헤븐>에서 집주인 남편은 하인들에게 자연스레 반말을 하지만, 집주인 아내는 하인들에게도 존댓말을 쓴다. 요즘 시대에 고용인이 피고용인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고 당연한 일이지만, 과거 계층사회에서 오직 여성만이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극히 부자연스럽다.
그동안 온갓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의 학습효과를 통해 남자는 반말, 여자는 존댓말을 쓰는 공식을 너무나도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됐다. 그래서인지 TV 속 아내가 남편에게 반말을 쓰면 어색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KBS에서 더빙했던 외화시리즈 <위기의 주부들 Desperate Housewives>을 보면, 부부간 또는 연인 사이에서 똑같이 서로에게 반말을 썼는데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오히려 가브리엘이나 르넷이 남편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이 도저히 상상이 안 될 정도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반말로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남녀가 같은 사회적 지위, 같은 환경에 있는 것이라면 똑같은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이젠 TV 속 남녀들의 언어도 현실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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